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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s story
문을 꼭 닫고 마주하는 시간을 빼앗겨 버린 올 한 해
계획했던 것들도 무산이 되고,
앞을 예측할 수 없어지니 두 가지 마음이 함께 들었습니다.
더 열심히 달려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서 타의적으로 벗어난 자유로움과
이대로 가라 앉아 버리지 않을까 하는 무거운 부담감
'아 하기 싫다'와 '이러면 안될 것 같은데'를 반복하며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맞이한 따뜻한 날씨.
이대론 그동안의 발버둥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는지
제주의 곳곳을 걸으러 나갔습니다.
그러자 보이는 제주의 여전한 풍경들.
조용하게 단정한 나무와 하늘의 모습 사이로 들리는 차분한 소리.
활기차던 분위기들이 사라지니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고 쉽게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조용한 풍경들은 그대로 남아 제 시간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제주에 와 처음 봤던 그 모습으로 그대로 있어준 풍경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또 한편에서 많은 것을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고마운 장면들을 하나씩 모아 담았습니다.
올 해의 고민과 티나지 않던 애씀이 모여 내년 한 해를 살아갈 힘을 더해주리라 믿어봅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연이 더욱 멋져 보였던 올 해,
어떤 화려한 순간보다 힘있게 느껴진 그 차분한 풍경들을 남겨 봅니다.
봄
봄이 되고 있음을 알리는
벚꽃 분홍 빛의 흩날리는 꽃잎은
괜히 마음을 더 들뜨게 합니다.
제주에 와서 한동안은 유채에 홀려 벚꽃을 잊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던 봄날, 어느 파란 지붕 집 위로 드리워진 벚꽃 나무를 보며 발 길을 멈추고 한참을 그 장면을 바라보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다시 느꼈던 분홍색의 조용한 충격 모두의 어린 시절을
물들였던 분홍색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꼈더랬죠.
벚꽃과 파란지붕
하도리에서 종달리 가는 길
해안도로는 구불 구불 하지만 볼 거리가 더 많은 그런 길.
옥 빛의 화려한 바다도 있지만 제 눈길을 끄는 건
초록이 많은 편안한 풍경입니다.
이름도 귀여운 하도리와 종달리.
하도리에서 종달리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다리를 건너갈 때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듭니다.
조용하지만 든든한 풍경이 언제든 위로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봄꽃이 핀 오름
높이 올라갈 수록 더 많이 보이는 초록.
그렇지만 하늘 아래 같은 초록이 없다는 듯
펼쳐진 너른 풍경
각 오름엔 봄 꽃들이
모두 다른 모양으로 피어있었습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예쁘게 피어나는 작은 꽃들은
꾸준한 힘을 느끼게 해줍니다.
초록과 작은 꽃들 사이로 느껴지는
봄의 생기를 담은 그림입니다.
여름
지미봉과 갈대 밭
종달리를 품고 있는 지미봉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갈 때 가장 먼저 반기는 갈대밭
계절이 지날 때마다 색이 바뀌어 가는 밭을 구경하는 재미에 이 앞을 지나가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종달리는 제주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마을 중 하나입니다.
조용하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아기자기한 사람들과 가게들,
또 단정하게 펼쳐진 오름과 바다의 모습들이 그저 편안한 마음을 들게 합니다.
그런 종달리가 맞아주는 가장 첫 모습을 남겨 놓고 싶었습니다.
노을이 지는 바다
파도가 가르는,
또 노을이 비치는 바다
여름 옥빛 바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여름,
강렬해진 해 아래 빛나는 바다와 나무, 풀들 이지만
한 편으로는 나 스스로도 어디론가 가볍게 떠나 있을 수 있는 여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부유할 수 있는 곳은 바로 바다에 몸을 띄우고 반쯤 물에 잠겨 있는 그 곳이 아니었을까.
우도가 비치는 저녁
해가 지는 저녁의 공기가 점점 선선해지는 계절이 오니 밤의 풍경을 보는 게 즐거워집니다.
구좌에서만 살다가 성산으로 이사오니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다 너머로 우도가 보인다는 것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또 가까운 섬 속의 섬은 적은 불 빛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가을
별이 더욱 밝아지는 날씨
거센 바람에 구름이 모두 날아가면 깨끗해진 하늘에
잘 보이지 않던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습니다.
그 별 아래로 드문 드문 켜져 있는
가로등이 비추는 밤의 풍경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힙니다.
바람부는 억새 오름
해질녘 조용한 도로
텅빈 도로에 멋지게 노을이 지는 모습을 혼자서 감상할 수 있는 그 때의 적막한 감탄 그 시간을 아껴 보고 싶었습니다.
조용한 밤 산책
가을이 되면 푸르던 제주가 하얗게 억새로 뒤덮입니다.
오름에 가득 찬 억새를 바라보면 여름을 마무리하는 아쉬운 마음을 화려하게 달래주는 듯 느껴집니다.
겨울
눈 내린 한라산
지난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 기온이 높아도 춥고 황량하게 느껴지는 겨울 제주가
너무 쉽게 지나가는 것 같아 어색하기도 하며 조금은 아쉬울 즈음.
겨울의 끝 자락인 2월에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그 눈을 많이 충분히 보고 싶어 한라산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눈이 내려 쌓인 한라산은 내가 알던 제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식생들이 보이던 제주의 산 모습은 사라지고 그 위로 눈이 가득 덮인 벌판.
그 풍경은 산이 아닌 넓은 초원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하늘을 보며 높이 올라왔는데 더 높이 올라가 있던 하늘과 그 아래 산이 아니라는 듯
펼쳐져 있는 눈 밭의 모습은 내가 모르던 어느 나라로 떠난 여행이 주는 낯선 설렘처럼
또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 한라산의 모습을 남겨놓습니다.
황홀한 동백군락지
어느덧 겨울이 되면 추워지고 삭막해지는 제주가
쓸쓸해지고 외로워지는 동안 한 켠에서는 황홀하리만큼 피어난 동백꽃
해가 질 무렵 동백군락지에서 마주한 꽃 밭의 모습이 겨울을 모두 칠한 듯 행복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021's calendar